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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토마스

역관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김범우는 1751년 서울 남부의 명례방(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중인(中人) 역관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역임했으나, 아버지 김의서가 사역원의 역원판관에 오르면서 역관집안으로 이름을 내게 됐다. 김범우는 16세가 되던 1767년에 역시 역관으로 유명한 천령 현씨(川寧玄氏 ; 이 집안도 열렬한 신앙을 받은 집안인데, 103위 성인인 현석문 가롤로가 있고, 그의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듬해 아들 인고(仁考)를 낳았다. 1773년에 역과 증광시에 합격해 종 6품인 한학우어별주부(漢學偶語別主簿)에 올랐다. 마침내 김범우는 1784년(정조 8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권면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해 가을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봄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에게서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적극적인 입교 활동과 순교
세례를 받은 후 김범우는 가족, 친지를 비롯해 같은 신분의 중인이나 천민들에게까지 천주교 교리를 전하며 적극적인 입교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특히 김범우는 자신의 집을 정기적인 신앙 집회 장소로 내놓아 신분 차별없이 모두들 그곳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1785년 봄, 추조의 포졸들에게 신앙 집회의 현장이 적발됐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 사건이 큰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김범우만 남겨두고 참석자들을 모두 훈방했다. 여러가지 형벌을 가하면서 김범우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비겁한 배교를 용감하게 거부했다. 결국에는 각종 고문과 형벌을 이겨내고 밀양 단장면으로 유배를 갔다. 그곳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렬히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문당할 때 매맞은 상처가 악화돼 유배된 지 약 2년 만인 1787년 9월 14일(양력)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교자현양위원회, 김범우 묘 발굴
「한국천주교회사(달레)에 의해 애초 김범우의 유배지는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김범우의 후손 김동엽과 가족 이야기, 호구단자조사 과정에서 김범우가 한양에서 밀양 단장(丹場)으로 이주하였음이 밝혀졌고 순교자현양위원회(당시 위원장 송기인 신부)는 몇 년에 걸친 지역답사와 수소문 끝에 1989년 5월 김범우의 묘를 발굴했다. 파묘 결과 묘지 관 자리 위에서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돌 3개와 치아가 발견됐다. 이 돌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와 같은 경우로 성물이 귀했던 박해시대에는 성물 대신 십자가, 나무묵주, 돌 등이 관 속에 들어갔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순교자로 시복 청원, 묘지 조성 작업
1990년 후반 각 교구별로 시복시성 작업(증거자 김범우 토마스)이 시작됐다. 부산교구에서는 30여 명의 순교자가 있었지만,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두 사람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고, 김범우 토마스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다.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시복 청원 분위기가 고조되자 본격적인 묘지 조성 작업을 진행, 2005년 9월 14일 김범우 묘역 준공 미사를 거행했다. 그후 교회사 연구를 통해 유배지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죽은 이들도 순교자로 시성된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부산교구에서는 김범우를 증거자가 아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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